딕뱃의 키워드는 푸른 새벽, 아이스크림 가게, 감기약, 처절함 입니다! 잘 엮어서 연성해보세요! 파이팅!
딕이 작은 쟁반을 내밀었다. 브루스는 오만상을 쓰고 그것을 노려보았지만 그것은 달아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브루스는 마지못해 물이 가득 찬 컵과 색색깔의 동그란 알약들을 집어들었다. 이부프로펜과 코데인, 항히스타민제, 비타민제... 한 알이라도 줄이고 싶어 자세히 쳐다보았지만 열과 근육통, 기침, 콧물을 골고루 달고 있는 몸으로는 여의치가 않다. 결국 브루스는 알약을 전부 입 안에 털어넣었다. 딕은 브루스가 잔을 단번에 비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진짜로 먹은 거 맞죠?
소리 없는 끄덕임이 돌아왔다. 딕은 브루스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검사하는 짓은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신체만큼은 지구 전체로 놓고 봐도 최상급이면서 브루스는 잔병 치레가 꽤나 잦았다. 특히 감기는 날씨가 바뀔 때마다 걸리는 편이었다. 아마 매일 같이 쌓이기만 하고 풀리지 않는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딕은 생각했다.
그것으로 이번 감기를 유난히 심하게 앓고 있는 것도 설명된다. 그 주 내내 쉴 틈도 없이 블랙게이트에서 일어난 집단 탈옥을 수습하고 다닌 탓이리라. 물론 브루스의 고집도 상태를 악화시키는 데에 한 몫 했다. 아침부터 종일 콜록거리고 다니더니, 오늘은 쉬라는 팀의 만류를 무시하고 패트롤을 돌러갔다가 끝내 열이 올라 쓰러지고 만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알프레드는 저택을 비운 상태로, 사흘이 지나서야 저택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뒷수습은 팀과 데미안이 해야했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둘에겐 브루스를 침대에 묶어두는 것이 한계였다. 결국 그들은 알프레드 다음으로 브루스를 오래 겪은 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팀의 믿음과 데미안의 의심 속에서, 딕은 브루스에게 약을 먹이는 것에 성공했다.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로 알프레드였다. 싫으면 알프레드 올 때까지 앓아누운 채로 있든가요. 그 한 마디에 브루스는 죽과 약을 받아먹었다. 딕은 아마 알프레드가 돌아왔을 때에도 감기 기운이 남아 있을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이건 다 브루스를 위해서였다. 비록 알프레드가 브루스에게 특별처방을 내린다 하더라도 말이다. 딕은 어릴 적에 자신도 몇 번 겪었던, 그 '특별처방'에 포함된 식단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어쩐지 브루스가 얌전해서 돌아보니 눈을 감고 있다. 자는 것 같아 턱까지 시트를 끌어올려주자 브루스가 눈를 번쩍 떴다. 싱글싱글 웃으며 마주보자 발갛게 열 오른 눈으로 그를 노려본다. 썩어도 준치라고, 눈물로 촉촉하게 젖은 것치고는 눈빛이 꽤나 매섭다. 하지만 딕은 이미 면역이 되어 있는 몸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최종병기를 다시 한 번 들먹였다.
-얌전하게 있어요. 알프레드 올 때까지.
그러자 또 다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다. 그를 속이는 것에 작은 죄책감을 느낀 딕은 미리 사죄의 의미로 작은 일이나마 브루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마치 쭉 생각해오고 있었다는 것처럼, 브루스에게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이스크림.
-네?
-아이스크림.
감기로 드러누워 놓곤 아이스크림이라고? 제정신이냐고 물으려던 딕은 아주 오래 전 열이 날 때면 알프레드가 직접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주곤 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입을 다물었다. 브루스에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지금 저택엔 알프레드가 없다. 고로 아이스크림을 만들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사와야한다는 뜻인데...
-...브루스, 지금 새벽 5시예요.
문을 연 곳이 있을 리가 없다고 말하자 브루스는 어울리지 않게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딕은 다 큰 성인 남성이 그런 얼굴 해봐야 소용 없다고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무뚝뚝한 양반이 시무룩한 표정까지 내보일 정도면 심각하게 아프다는 뜻이거나 그만큼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딕이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걸 확인한 딕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 트기 직전의 푸른 새벽빛에 반짝이는 도시는 제법 아름다웠다. 이른 시각임에도 거리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시민들에게선 생동감이 느껴졌다.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광경을 보며 딕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런 평범함이 고담이 느리게나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지표라고 믿었다. 브루스가 그들을 이끌고 길고 힘든 싸움을 해온 보람이 있는 것이다. 딕은 브루스가 곁에 있었다면 그 역시 뿌듯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나가던 여자가 혼자 웃고 있는 딕에게 이상한 시선을 던졌다. 자신이 거리 한가운데에 서있다는 걸 깨닫고 멋쩍어진 딕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바닥에 앉아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감기로 앓아 누운 고담의 수호자를 위해서.
그러니까 약 먹기 싫은 브루스가 처절함 진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