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뉴욕 한복판에서 건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있은 지 약 두 달이 지났다. 건물 안에 있던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 및 유가족 연락은 이제야 전부 끝이 났다. 건물 아래쪽은 뭉개졌지만 위쪽은 큼지막하게 무너지는 바람에 처리가 까다로워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었다. 피터는 전화를 끊고 눈을 감았다. NYPD의 전화였다. 사고 피해자의 사체는 찾지 못했지만 가방은 남아 있었다고, 원한다면 찾아가라는 전화였다. 엘이 간 지 몇 년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엘의 시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장례식을 미루고 미루었었는데 이제 그럴 이유도 사라졌다. 피터는 점심 시간에 나가서 가방을 찾아와야 겠다고 결정했다.
피터가 복직한 지 2주하고도 3일 째의 날이었다. 피터는 폭행으로 근신 1주일 처분을 받은 후 휴즈에게 1주일 휴가를 더 요청했다. 국장은 이유도 묻지 않고 허락했고, 피터는 그 일주일 후 거짓말 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복귀했다. 아직 엘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럴 날은 없을 것이다. 그저 가끔 들춰보며 눈물이 아닌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엘을 추억이라는 이름의 파일에 곱게 갈무리해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섣불리 다가오지 않던 부하들도 피터가 예전처럼 커피를 입에 달고 다니며 손가락을 까딱여서 사람을 부르고 활기차게 회의하는 모습을 보고는 보스가 돌아왔다는 걸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딱 한 명, 모 정보원만 빼고.
피터는 아직 닐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닐에게는 미안하지만, 피터는 애초에 닐을 바로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최소한 장례식은 치른 후에 받아줄 생각이었다. 닐을 괴롭히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인간된 도리로서 그 후에야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 것뿐이다. 물론, 장례식 먼저 치렀다면 마음의 정리를 깨끗이 마친 후에야 닐을 받아들였을 테지만 말이다.
피터는 약간 심술궂게 기약없이 마음을 정리하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언젠가는 분명히 있을 장례식을 기다리는 편이 더 낫겠지, 하고 생각했다. 닐이 싫거나 꺼려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맘에 드는 편이지. 인정하긴 싫지만 매력있고. 그리고... 테크닉도 꽤나... 피터는 혹시라도 닐이 자신의 생각을 들었을까봐 바깥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닐은 다이애나와 함께 존스를 가리키며 떠들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싶어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닐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유리창 너머 피터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피터는 아까 했던 생각을 떠올리며 괜히 닐에게 인상을 썼다. 그러자 닐이 배시시 웃었다. 피터는 고개를 저으며 모니터로 얼굴을 가렸다. 잔뜩 달아 있는 주제에 끊임없이 덤벼든다. 엊그제 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기에 정색을 하고 혼내서 기가 팍 죽었다 싶더니,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나칠 때마다 고의로 스치고 다닌다. 그러면 누가 손해인데? 피터가 생각했다. 나보단 한참 끓을 나이인 네가 더 힘들겠지. 피터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쩍 모니터 뒤를 내다보았다. 아, 여전히 이쪽을 보고 웃고 있다. 피터는 제멋대로 나오려는 미소를 파일로 감추고 점심 시간이 되면 잊지 말고 NYPD에 들러야겠다고 다짐했다.
2.
가방은 멀쩡했다. 그 주인과는 다르게도, 라는 우울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엘이 아끼던 가방이었다. 결혼 기념일 선물이기도 했다. 이런 걸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말이 머리를 스치는 바람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 저 쓸데 없는 생각 때문에 깨끗이 정리해놓은 '추억 파일'이 쏟아질 뻔 했다. 아마 저것을 볼 때마다 그렇게 흔들릴 것이다. 그래서, 저 가방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가방이 미워서 눈 앞에서 치워버리려는 생각인 것만은 아니다. 엘이 아끼던 것이고, (아마) 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을 물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슷한 의미로 관에 들어갈 물건들이 더 있다. 엘이 좋아하던 CD 중 한 장, 엘이 즐겨 읽던 책, 첫 데이트 때 엘이 입었던 옷, 엘이 아끼던 신발 등등. 이렇게만 넣으면 허전할까.
"엘이 좋아하던 꽃도 넣어요."
좋은 생각이다. 허전해 보이는 공간은 엘이 좋아하던 꽃들로 채워야겠다. 좋은 생각을 해낸 것이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녀석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지난 며칠간 끝없이 치근덕대더니 욕구불만이 정점에 달한 모양이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불만은 넣어둬라, 닐.
"요원님 사진도 몇 장 같이 넣어요. ...심심하시지 않게."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현실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나도 녀석도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수염 기른 사진도 꼭 넣어드려요."
엘은 수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꼭 한 장 넣어줘야겠다. 녀석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사진 말고도 사치모의 사진, 그리고 녀석과 녀석의 작달막한 친구의 사진도 넣을 생각이다.
...맨 마지막의 사진을 얻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엘이 널 꽤나 좋아했으니 사진 한 장 정도는 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해 봐야겠다. 녀석의 사진은... 내 스크랩에 넘칠 만큼 있으니 됐고.
"감옥 갈 때 찍은 사진은 생각도 하지 마세요."
내 생각이 들리더냐. 돌아보니 녀석이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 있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사진 안에는... 녀석과 녀석의 난쟁이 친구가 들어 있었다. 망할 녀석. 눈치는 더럽게 빠르지.
"제 장례식이었다면 저도 요원님과 사모님 사진을 넣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을 거예요."
녀석이 자기 장례식이라고 하니 생소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잘 살 것 같은 녀석이... 닐 카프리의 장례식이라, 역시 안 어울린다. 그리고 엘 사진은 내가 볼 것도 부족하다. 녀석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흐응, 하고 웃는다. 그러더니 "그래요? 그럼 절대 안 죽어야지."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녀석이 떠올린 세 번째 좋은 생각이다. 닐 카프리의 장례식이라는 말도 이상하고, 네녀석에게 줄 사진도 없으니 죽지 마라.
가장 얻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물건이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나머지 물건들을 관에 넣을 시간이다. 이 계절에도 붓꽃이 있나 꽃집에 전화해 봐야겠다.
장례식은 엘의 가족, 친척들과 친구 몇 명, 그리고 엘을 알았던 내 동료들, 마지막으로 엘과 나의 친구들만 참가해서 치렀다. 이때라면 다시 눈물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엘의 관 위에 흙을 뿌리고 관을 묻을 때까지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눈물이 전부 머리 속으로 흐른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옆에서는 녀석이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귀를 열어보니 존스가 흙을 떠담으며 울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내가 그 동안 뭔진 몰라도 대답을 하긴 했는지 "그렇죠?"라고 묻고 있었다. 내가 멍하게 쳐다보고 있자 녀석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는 눈 앞에서 손을 흔들어 댄다. 당장 치우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서너 번을 시도한 끝에야 목소리가 나왔다... 만 내 목소리는 아니었다.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꽉 막힌 목소리가 "당장 그 손 치워."라고 말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해주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참 고마웠다. 아까 울었다던 존스인가?
어찌 되었든 녀석은 고분고분하게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냥 물러서지는 않았다. "다 우셨어요?"가 나에 대한 도전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녀석은 내게 대꾸할 틈도 주지 않았다. 녀석은 언제부터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와인을 한 잔 따라 내게 건넸다. 평소라면 와인은 사양하겠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목이 말라서 그런 걸 따지고 싶지 않았다. 한 번에 쭉 들이키자 녀석이 옆에서 "이건 맥주가 아니라 와인인데..." 어쩌고 중얼거린다. 뭐 임마, 라고 (아까의 그 누군지 모를 남자가) 말하니까 녀석이 입을 다문다. 녀석이 조용해지자 사방이 조용하다. 한참 동안 숨소리만 들렸다.
갑자기 녀석의 팔이 내 어깨를 감쌌다. 이놈이 또 이런다,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장례식이 아까 전에 끝났다는 것이 기억났다. 축하한다. 네 기다림도 이제 끝이다. 하지만 그 놈의 목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는 새에 녀석이 선수를 쳤다.
"예전에...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어요."
누구랑? 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요원님을 부탁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누가? 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요원님이 멍청하게... 과거만 붙잡고 정신 못 차리면 혼내주라고도 하셨어요."
녀석은 내 표정을 보고 재빨리 "물론 요원님 혼자서 잘 하셨지만." 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그 두 가지는 꼭 그러겠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힘들 거라고 했어요."
녀석은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요원님께 계속 살아갈 원동력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달라는 거였거든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녀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왜 그건 힘들 거라고 대답했는지 요원님도 아시죠?"
물론 알고 있다. 엘을 추억으로 남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 이유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요원님을 제 손으로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녀석이 말을 하다말고 눈을 감았다.
"제가 너무 부족하다거나,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포기할 게요."
역시 멀쩡하게 복귀했는데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 걸렸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조건이 '마음 정리'와 '장례식' 요 두 개였다고 말해줄 걸 그랬나. 녀석은 드물게도 자신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뭐라고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난 마음을 굳힌 후였다.
사실, 관을 묻고 돌아서던 순간부터 멋대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은 바로 그 때부터 옆에 딱 붙어서 온갖 이야기를 늘어 놓다가,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올 때면 잽싸게 나서서 '요원님은 지금 몸이 좋지 않으셔서 들어가셔야 해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며 막아주었다. 그리고는 여태껏 내 옆에 앉아서 적막한 집안에 약간이나마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이런 기특하고 귀여운 녀석을 두고 다른 사람이라니. 물론, 어린 놈에게 깔린다는 것이 조금 자존심 상하기는 하다만, 남들에게 말할 것도 아닌데 뭐 어떻겠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비하면 자존심 조금 정도야 내줘도 괜찮은 것 아니겠나. 그런 고로, 이제 자존심을 조금 버리고 저 얼굴에 안 어울리는 자신 없는 표정을 버리도록 기운을 북돋아줘야 겠다.
"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