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뱃
3에서 설정이 자꾸 왔다갔다해서 뜯어고치느라 2가 완성이 안 됨ㅎㅎ....
그래도 자리는 찍어두고... 제목 같지 않은 제목도 헤헤
1.
브루스는 클락이라면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살짝 말을 더듬으며 사랑을 고백할 거라고 생각해 왔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런 모습이 불에 태우고 싶을 정도로 못난 정장을 입고 촌스러운 안경을 낀 클락 켄트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다른 반절이 언제나 믿음직스럽고 당당한 슈퍼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브루스는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그것은 클락 켄트라는 위장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먹히는지를 말해주는 지표였다.
하지만 클락 켄트는 위장이 아니었다. 슈퍼맨과 마찬가지로 그의 본모습이었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외계인. 바로 그렇기 때문이었다. 브루스가 하마터면 그 말을 평소의 쓸데없는 잡담으로 여기고 한 귀로 흘릴 뻔한 것은.
"사랑해, 브루스."
그가 생각해왔던 것과 달리, 클락의 고백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마치 아침식사는 잘 했냐고 묻는 듯이 여상스럽기 그지 없었다. 유틸리티 벨트를 수리하던 브루스는 음, 하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가 뒤늦게 그 맡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들어 클락을 쳐다보았다. 클락은 브루스를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친구 관계를 단번에 날려버릴 소리는 한 적이 없다는 것처럼. 브루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이 최근에 이상한 가스나 광선에 노출된 적이 있었나 생각했다. 없었다. 클락이 마인드 컨트롤을 당했을 가능성도 계산해 보았지만, 지구 최강의 남자를 이용해 그에게 사랑고백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정신조종계 빌런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크립토나이트일까. 브루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새로운 크립토나이트가 발견된 모양이었다. 그 색이나 효능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단 가장 그럴싸한 가설은 두 가지였다.
A. 다른 이들에게서 슈퍼맨이 미쳤다는 호출이 오거나 슈퍼맨이 아무에게나 사랑을 고백하고 다닌다는 속보가 뜨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그에게만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다른 히어로들과 그의 차이가 무엇인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슈퍼맨의 가장 친한 친구는 배트맨이다. 깊은 우정을 사랑으로 변질시켰다면 감정을 과장시키는 효과일 것이다.
A-1. 루터의 사진을 보고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확인해보자.
A-2. 강하게 거절해보자.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면 확실하다.
B. 그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효과일지도 모른다. 크립토나이트를 발견한 직후 그에게 달려온 탓에 그가 처음으로 그 효력을 목격한 것이다. 다른 이를 마주쳤다면 그 사람에게 같은 소리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B-1. 확인을 해야하니 알프레드를 불러보자. 알프레드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B-2. 어쩌면 새끼오리처럼 처음 본 사람에게 각인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알프레드를 불러보자.
정밀한 검사와 실험을 계획하고 있는 브루스와 달리, 정작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는 평온했다. 클락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채로 브루스가 생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간이 꿈틀거리며 깊은 주름을 만들고 하늘빛 홍채에 감싸인 까만 동공이 살짝 확장된다. 자신이나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의심부터 하고 있을 것이다. 수년 동안 함께 하며 깊은 우정을 쌓았으면서도 브루스는 클락의 감정이 우정을 넘어섰다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다. 둔하거나 눈치가 없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그런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클락은 브루스를 탓하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브루스에게 이런 감정을 가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첫 만남 때의 클락이 지금의 클락을 본다면 아주 정신이 나갔다고 여길 터였다.
그래서 클락은 브루스를 기다려주기로 결심했다. 정신지배도 크립토나이트도 외계광선도 아니고, 클락의 탈을 쓴 다른 존재인 것도 아니며, 잠깐의 착각도 한순간의 흔들림도 외로움의 유혹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줄 것이다. 하나하나 지워나갈 때까지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상기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의심과 미혹이 벗겨지고 브루스가 그의 고백을 순수한 감정으로 들을 수 있을 때가 되면, 마지막으로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도 거절 당한다면 깨끗이 물러날 것이다.
생각에 빠진 브루스도 그런 브루스를 지켜보는 클락도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일단 가설 B부터 실험해보자는 결론을 내린 브루스가 알프레드를 부르려 했을 때였다.
"리그 호출이야. 그럼 다음에 봐."
클락은 브루스가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빠르게 날아갔다. 브루스는 조금 짜증스럽게 그가 남기고 간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알프레드의 포커페이스를 깰 기회가 날아간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한가한 생각은 잠시뿐이었다. 브루스는 클락이 사라지기 직전에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남자답지 않게 실망도 초조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담담한... 인내였다. 뭘 참고 있는 걸까, 브루스는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만인에게 사랑을 전파하고 싶었던 걸까. 거기에 생각이 미친 브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슈퍼맨이 미쳤다는 뉴스와 동료 히어로들의 제보를 상대해야했다.
2.
놀랍게도, 슈퍼맨이 이상해졌다는 그 어떤 소식도 없었다. 마구잡이로 사랑을 외치지도 않고, 빌런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지도 않았다. 다이애나와 배리에게 슈퍼맨에게 이상한 점이 없었나 물어보자 평소와 다름없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오히려 괜한 호기심만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다이애나의 물음을 아니라는 단답으로 막고 통신을 끊어버린 브루스는 가설 A와 B-1을 폐기시켰다. 남은 것은 B-2, 즉 각인효과설이었다. 이것이라면 그나마 괜찮았다. 분노를 누르지 못해 선을 넘을 위험도, 슈퍼맨을 희대의 바람둥이로 만들 일도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내부에도 아무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브루스는 최대한 빨리 클락을 검사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상이 발견되면 크립토나이트의 효과를 중화시킬 방법도 찾아야했다. 이것은 다 클락의 안녕을 위해서였다. 클락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묘하게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절대로.
슈퍼맨이 곧 귀환할 거라는 리그의 연락을 받은 직후 브루스는 고독의 요새로 출발했다. 브루스는 클락이 유일하게 고독의 요새를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허락해준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는 클락을 빼닮은 안드로이드의 공격을 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요새 내부는 입김이 올라올 정도로 추웠다.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클락에겐 난방이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클락이지만 가끔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곤 했다. 그럴 때면 브루스는 기분이 묘했다. 결국은 외계인이고 이방인이라는 생각에, 언젠가 인간이길 그만둘 수도 있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눈에서 레이저를 뿜고 몸으로 총알을 튕겨내는 것보다 집에 난방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는 자신을 비웃으며, 브루스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크립토나이트는 발견되지 않았다. 크립토나이트처럼 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것 자체가 없었다. 누군가가 사는 장소치고는 꽤나 휑한 이곳은 얼마 전에 찾아왔을 때와 달라진 점이 조금도 없었다. 브루스는 결국 크립토나이트를 찾는 것은 미뤄두고 컴퓨터로 향했다. 클락이 위험한지부터 알아보아야 했다.
브루스가 한창 클락의 평소 신체 상태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는 도중에 클락이 돌아왔다. 클락은 요새를 제 집, 아니, 제 동굴처럼 쓰고 있는 침입자를 보고도 눈썹을 들어올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트비전을 이용해 공기를 데워주기까지 했다. 브루스는 고맙다는 말 대신 컴퓨터 앞을 가리켰다.
"여기 서."
"왜?"
그러면서도 클락은 순순히 브루스가 가리킨 곳에 섰다. 브루스는 크립톤 언어로 몇 가지 명령어를 중얼거리며 스캔을 시작했다. 클락은 활짝 웃지 않으려 애를 썼다. 브루스를 위해 요새 내의 모든 기능이 영어로도 작동하게 설정해두었는데도, 브루스는 급할 때가 아니면 언제나 크립톤 어를 이용했다. 단순히 새로운 언어를 익히려는 학구열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클락은 고향의 언어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들려주려는 브루스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브루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클락의 신체를 스캔한 결과는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정상 결과와 똑같았다. 그 어떤 수치도 올라가거나 내려가있지 않았다. 벌써 효과가 사라진 건가. 반나절만에 완벽히 정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애초에 효과 자체가 미미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여타 광선에 맞지 않았다는 것도 밝혀졌다. 브루스는 살짝 안도했다. 클락에게 닥친 위험은 없었다. 그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브루스는 다시 이런 상황을 불러온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크립토나이트는?"
"무슨 크립토나이트?"
"새로 발견한 거."
"그런 거 없는데?"
클락은 브루스가 크립토나이트 중독을 의심한다는 것을 깨닫고 몰래 웃었다.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크립토나이트라. 물론 그런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야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이 크립토나이트에 의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몇년 동안 크립토나이트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셈이니까. 아무리 무해한 종류라고 해도 그 광석이 내뿜는 방사능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락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그 날 오전부터 처음 보는 물체를 만진 적이 있느냐, 낯선 이에게 뭔가 받은 적이 있느냐, 이상한 것을 먹었느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는 클락이 출근길부터 케이브로 날아올 때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재연 해준 뒤에야 크립토나이트나 그 비슷한 것에 노출된 적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더욱 큰 문제가 생기고 만다. 외부적 요인이 없다면 지금 이것이 온전히 클락의 문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아니라면... 막연한 가능성 하나가 몽실몽실 떠올랐지만 브루스는 그것을 외면하고 판단을 보류했다.
고담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브루스는 습관처럼 거절했다가, 그래야 패트롤을 더 오래 돌 수 있을 거라는 덧붙임을 듣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클락은 브루스가 타고 온 배트윙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가을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백야가 끝나지 않아 늦은 시간임에도 사방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고담이 극지방에 있었다면 브루스는 6개월 단위로 자경단 활동을 해야했을 것이다. 아니, 그럴 남자는 아니었다. 알아서 대책을 강구해내면 또 모를까.
"클락."
브루스가 카멜레온처럼 색이 변하는 슈트를 입고 패트롤을 도는 상상을 하며 키득거리던 클락은 그의 이름이 불리는 소리에 급히 웃음을 지우고 몸을 돌렸다. 어느새 브루스가 바로 뒤에 와있었다. 클락은 배트윙을 향해 팔을 뻗으며 몸을 숙였다.
"배트맨 퍼스트."
브루스는 클락의 장난에 코웃음을 치며 배트윙에 올라탔다. 클락은 브루스가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트윙을 들어올렸다.
자신있게 말한 대로, 고담까진 금방이었다. 클락이 널찍한 건물 옥상에 배트윙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배트맨이 조종석에서 뛰어내렸다. 브루스는 무인조종으로 배트윙을 돌려보낸 후 클락을 돌아보았다. 이제 가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제 가라는 무언의 축객령이겠지만. 브루스는 클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가 알아서 떠나리라고 믿는다는 뜻이었다. 그의 믿음을 저버릴 생각이 없는 클락은 날아가려는 듯이 몸을 살짝 띄웠다. 하지만 떠나기 직전에 브루스의 시야를 가리고 섰다. 조금 짜증 어린 시선이 클락을 향했다. 클락은 매서운 눈빛을 받으며 살풋 웃었다.
"사랑해."
즉시 브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클락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다.
"아무 이상 없다는 거 방금 직접 확인했잖아."
"기억을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럼 스캔 결과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었겠지."
"정신지배는 신체에 영향을 주지 않아."
"기껏 정신지배를 해놓고 배트맨한테 사랑 고백을 시킨다는 게 말이 돼? 대체 왜 그러겠어? 배트맨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아니면 누군지 모를 그 정신계능력자가 배트맨을 짝사랑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그놈이 사랑의 전도사라서?"
브루스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고 말았음을 깨달은 클락은 참을성을 갖기로 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재빨리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 당장 대답을 듣겠다는 게 아니야. 이게 내 진심이라는 것만 알아줘. 아무 것도 의심하지마. 아무 것도."
마지막 말을 강조한 클락은 브루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배트맨은 어두운 하늘에 남은 붉고 푸른 잔상을 바라보다 이내 고담의 밤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기껏 시간 맞춰 도착했는데, 오늘은 온전히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3.
브루스는 며칠 전의 CCTV 기록을 재생시켰다. 외부적 요인이 없다면, 클락 켄트 자체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브루스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클론, 혹은 다른 차원의 클락. 하지만 두 시간째 들여다보고 있어도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클락의 말이 떠올라 여지껏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을 의식하고 말았다. 화면 속의 클락은 브루스에게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대화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으로 보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꽤 오래 전의 기록으로 거슬러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클락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브루스의 지시에 따라 모니터를 보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그곳에 브루스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클락의 헛소리에 휘말리고 말았다. 클락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가짜 클락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잠시 그 생각을 검토해본 브루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너무 편집증적인 관점이었다. 게다가 현재의 클락이 가짜라는 사실을 하루이틀도 아닌 수 개월 동안이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탐정이라고 불리는 그가 절친한 친구가 바뀌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세계 제일의 탐정 타이틀을 내놔야 할 것이다. 또한 만에 하나 그를 속여 넘겼다 하더라도 마샨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샨에게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을 보면 클락은 진짜였다. 그렇다면 최종적인 결론은, 그가 알던 클락이 스스로의 의지로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왜일까? 브루스는 생각에 잠겼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경계는 불분명하다. 깊은 우정과 사랑은 더욱 더 그렇다. 클락이 로이스 레인에게 거절당한 후 상심에 빠진 나머지 가까운 친구를 향한 우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락은 좋은 친구이자 훌륭한 동료였다. 브루스는 단순한 착각으로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클락이 상처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다음 번에 클락이 찾아오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결정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무언가가 케이브에 접근한다는 알림이 떴다. 가까워지는 속도를 보니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클락이었다. 정지한 CCTV 화면을 향해 고개를 든 직후, 땅에 발을 딛는 소리와 함께 작은 웃음소리가 고요한 케이브를 울렸다. 브루스가 무슨 까닭으로 예전 CCTV를 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알아냈는지 깨달았으리라. 이를 알면서도, 브루스는 화면을 전환시켰다. 너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고, 나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고 시위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클락은 언제나처럼 숨겨진 의도를 무시하고 곧게 달려왔다.
"내가 진짜라는 결론이 나왔으니까 들어오게 해준 거겠지?"
클락의 목소리에선 가짜라고 의심 받은 것에 대한 불쾌감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클락은 그런 남자였다. 의심 많은 그를 이해해주고 그 의심이 가장 친한 친구인 그를 향하더라도 포용해주었다. 브루스는 그런 클락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클락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딱 잘라 말했다.
"착각이야."
클락은 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그렇다고 덜 아픈 것은 아니었다. 단호하게 클락의 감정을 부정한 브루스는 한 번 더 강조했다.
"넌 지금 우정을 사랑으로 혼동하고 있어."
"아니, 이건 사랑이야.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 널 위해서라면 내 목숨쯤은 기꺼이 내줄 수 있어."
"우정도 마찬가지야."
"널 지켜주고 싶어."
"필요 없어.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네가 느끼는 보호본능은 전 인류가, 아니, 모든 생명체가 대상이지."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반박할 거야? 그렇다면 널 독점하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인간관계에선 흔한 감정이야."
클락은 고개를 저었다. 이 문답은 그 스스로도 몇 번이나 주고 받은 것이었다. 맨 처음엔 그 역시 감정을 부정했다. 우정이 깊어진 나머지 사랑과 헷갈린 거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친구 사이에 존재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었다. 브루스를 만지고 싶었다. 그와 살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이것은 다른 관계의 사랑에도 존재하는, 친밀감을 확인하는 가벼운 스킨쉽과는 달랐다. 좀 더 뜨겁고 끈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클락은 그 부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브루스가 단순한 육욕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브루스의 마음이었다. 그는 브루스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조르는 게 아냐."
"아니라고? 지금 세 번째로 거절하고 있잖아."
"아니, 넌 거절한 적 없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시했을 뿐이지. 처음엔 크립토나이트 때문이라고 믿었고 아까 전까진 내가 가짜라고 의심했잖아. 그리고 지금은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어느 쪽이든 내 감정 자체를 부정하는 거야. 브루스,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감정에 대해서, 아니면 네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어?"
"......"
브루스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곡을 찔렀다는 뜻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클락은 소리 없이 기뻐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진지하게 생각해줘. 그 때가 되면 거절해도 돼. 나 같은 놈은 눈에 안 찬다고 내쳐도 괜찮아.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변할 일은 없을 거니까."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클락은 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케이브를 떠났다. 브루스는 짧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클락이 진심일 리가 없었다. 로이스 레인이나 다이애나 같은 미녀들을 봐왔는데 각지고 흉터투성이인 남자의 몸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겠는가.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내적인 면도 마찬가지였다. 배트맨은 공포의 상징이고 두려움의 대상이지 사랑을 느낄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배트맨이 아닐 때조차도 그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남자였다.
진심이 아니어야 했다. 타의나 착각이라면 클락 혼자만의 문제이지만, 클락이 진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이것은 그들의 문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역시 클락에 대해, 클락과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의 가슴 밑바닥 어딘가에는 클락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알고 싶지 않은 깨달음을 얻어버릴까 두려워서 일부러 깊이 묻어버린 질문들이 담겨 있었다. 그것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제 기억 나지 않지만, 위험하다는 것 하나는 알고 있었다.
브루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그의 다른 말은 모두 잡아먹히고 킹만 남은 게임이었다. 무승부라도 얻어내거나, 패배를 받아들이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그는 무승부도 패배도 싫었다. 상대가 지쳐서 기권할 때까지 도망다니고 싶었다.
4.
브루스는 전략·전술가답게 생각이 많은 남자였다. 그것을 아는 클락은 브루스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시선이 마주치거나 스쳐 지나갈 때마다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과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기다리고 있음을 은근하게 보여주었다. 대신 그가 부담감은 느끼지 않도록 케이브에 찾아가는 것은 자제했다. 지금까지는 잘 지켜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클락은 벅찬 가슴으로 요새 한 켠을 뒤덮은 장미 덩굴을 바라보았다. 진녹색 잎사귀 사이로 북극의 빙하처럼 파란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크립톤의 장미였다. 칸도르에서 얻어온 종자는 키우기가 까다로웠다. 처음엔 아무 이유도 없이 싹을 틔우지 않았고, 간신히 싹이 올라오더라도 순식간에 말라 죽었다. 클락은 수많은 실패를 거친 후에야 칸도르의 환경과 같은 성분을 지닌 대기와 물을 조합하는 방법과 인공적으로 만든 붉은 태양광을 어느 정도의 세기로 쪼여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물론 무사히 싹을 틔운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풍성하게 꽃을 피우려면 나무를 돌봐야했다. 붉은 태양광 때문에 클락은 정원에서는 평범한 인간과 같았다. 장미 덩굴을 돌보다 보면 가지에 긁히고 가시에 찔리는 건 예사였다. 꾸준히 물과 영양분을 주고 흙을 섞어주고 가지를 치는 것도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클락은 기계를 이용하지 않고 모두 제 손으로 해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마음은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직접 피워낸 꽃이었다. 두 눈으로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수 없는 고향의 일부를, 그것도 그에게 무해한 것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지에서 꺾은 장미 두 송이를 스몰빌에 가져간 것이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을 받고 기뻐하는 부모님을 보며 클락은 지금까지의 고생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져다주고 싶은 또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다른 말 없이 선물만 전해주는 것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클락이 헛기침을 했다. 클락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 그를 무시하던 브루스는 그제야 마지못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클락의 묘한 자세에 미간을 찡그렸다. 클락은 한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뭔가 들고 있는 것이다. 임무와 관련된 거라면 당당하게 들고 왔을 테니, 그가 보고 놀랄 거라고 생각되는 무언가을 들고 있는 것이 뻔했다. 건물도 가볍게 들어올릴 크립토니안이라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브루스는 꺼내보라는 뜻으로 턱을 까딱였다. 그 건방진 태도에 클락이 픽 웃으며 내민 것은 푸른빛의 장미였다. 선명한 하늘색 장미는 브루스가 알기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브루스가 확인을 구하듯 바라보자 클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칸도르에 갔을 때 종자를 좀 구해왔었어."
칸도르라면 크립톤의 수도였던 도시였다. 브루스는 언젠가 클락의 생일선물로 크립톤이라는 이름이 붙은 장미를 선물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이름이 같을 뿐인 일반적인 장미였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크립톤의 장미였다. 브루스는 클락에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방어적인 태도는 일단 집어 치우기로 결정했다. 미묘하게 벌리고 있던 거리를 좁힌 그는 조심스럽게 꽃을 받아들고 감상하듯 살펴본 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아름다워."
클락은 눈을 깜빡였다. 자칫하면 예의상 해준 성의 없는 말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짤막한 한 마디였지만 브루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많은 이들의 믿음과 달리 브루스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표현이 적고 잘 다스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가 어떠한 의도도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름답다고 말했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는 뜻이었다. 클락은 가만히 웃었다. 짧은 침묵이 지난 뒤 브루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름다웠을 거야."
클락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브루스는 그의 고향도 이처럼 아름다웠을 거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클락은 손을 뻗어 브루스가 쥐고 있는 장미 가지를 같이 잡았다. 가지가 짧은 탓에 어쩔 수 없이 겹치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이 정도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브루스의 손등 일부를 손바닥으로 살짝 덮였다. 브루스가 조금 놀랐는지 심장이 한 번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모르는 척 말했다.
"응. 그랬을 거야."
브루스는 향수에 빠진 클락을 내치지 않았다. 클락은 브루스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보여주는 다정함을 사랑했다. 클락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브루스가 더 불편해하기 전에 손을 떼어낸 뒤 부드럽게 물었다.
"마음에 들어?"
"음."
"선물이야."
브루스가 생각도 못 했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귀한 선물이었다. 동시에 과한 선물이었다. 브루스는 장미를 시들지 않게 돌볼 자신이 없었다. 크립톤에서 자라던 외계 식물이 지구의 물과 노란 태양빛으로 살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말라 죽을 거야."
"괜찮아."
귀한 품종이 아니던가? 꽃이 피기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은 어떻고? 브루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클락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키워야하는지 알아냈거든. 꽃집을 차려도 될 만큼 잘 자라고 있어. 다음에 요새에 오면 보여줄게."
그 말과 함께 클락은 케이브를 떠났다. 브루스는 손에 들린 꽃을 바라보다가 클락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락이 쥐었던 손등이 아직도 후끈했다.
크립톤의 장미는 어두운 케이브 안에서도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오히려 그림자를 먹고 피어나는 것처럼 케이브가 어두울수록 서늘한 푸른빛을 내뿜었다. 브루스는 케이브를 밝히던 모니터와 조명을 모두 껐다. 그의 손조차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찾아왔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장미는 고고하게 빛났다. 홀린 듯 테이블로 다가간 브루스는 그 아름다움에 한참 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주인님?"
그를 현실로 불러온 것은 알프레드의 목소리였다. 브루스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 어두워 계단을 내려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멍하게 조명을 켰다. 그제야 알프레드가 쟁반을 들고 내려왔다.
"이것 좀 봐요, 알프레드."
브루스는 다시 한 번 불을 껐다. 알프레드는 희귀한 장미를 보며 감탄했다.
"정말 아름답군요. 켄트 님께서 가져다주신 것이리라 믿습니다."
그 말에 브루스가 알프레드를 조금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알프레드는 사방이 어둡다는 점을 이용해 눈치 채지 못한 척했다.
"주인님의 친구분들 중에서,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하고 많은 물건들 중 꽃을 가져올 정도로 감성적이신 분은 켄트 님밖에 없지요."
맞는 말이었으나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프레드는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눈치가 빠르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제 아무리 크립토니안이라 해도 알프레드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가 클락의 마음을 알았다는 사실만 드러낼 뿐이었다. 브루스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조금 심술을 부려 조명을 켰을 뿐이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기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태도로,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휴식을 취하시라는 말과 코코아와 쿠키가 든 쟁반을 남기고 사라졌다. 딱히 알프레드의 말을 따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브루스는 그 뒤로도 가끔 케이브의 모든 불을 끄고 장미를 감상했다. 그 빛깔 때문인지 멍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크립톤 장미는 전혀 생기를 잃지 않았다. 브루스는 크립토니안이 노란 태양 아래에서 초능력을 얻은 것처럼 크립톤의 꽃도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또 다시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빌런들과의 싸움이 길어져 브루스는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케이브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잠들었을 알프레드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하게 움직였다. 먼저 뜨거운 물로 먼지와 피로를 씻어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침대에 지친 몸을 누일 생각으로 가득 차 계단으로 향하던 그의 시선에 문득 장미가 들어왔다. 뭔가 다르다. 짚어낼 수는 없어도 미묘하게 느껴지는 차이에 브루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아. 브루스가 멈칫했다. 테이블 위에 꽃잎이 한 장 떨어져 있었다. 완벽한 모양이었던 꽃송이도 한 부분이 빠져 있었고, 선명하던 색깔 역시 조금 바랜 듯했다. 드디어 수명을 다한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잠시 꽃을 버려야하나 생각하다 마음을 바꾸었다. 미관상으로는 좋지 않을지 몰라도, 이 귀한 것을 함부로 버리고 싶지 않았다. 환경이 맞지 않는 행성에서 클락이 힘들게 키워낸 꽃이다. 그뿐인가. 잃어버린 고향의 꽃이라는 깊은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 생명을 완전히 잃어버릴 때까지 지켜봐주는 것이 선물을 준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브루스는 조심스럽게 떨어진 꽃잎을 집어들었다. 알프레드가 치우기 전에 먼저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시든 꽃잎을 어디에 두어야 알프레드가 버리지 않을지 알 수가 없었다. 포이즌 아이비와 관련된 증거물 사이에 두면 손대지 않겠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이것을 그런 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생각에 빠져 걷다보니 침실 앞이었다. 브루스는 결국 꽃잎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도 딱히 꽃잎을 보관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에 쥐고 잘 수도 없었다. 브루스는 일단 알프레드가 열어보지 않을 것이 분명한 침대 옆 테이블의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그의 부모님의 사진을 비롯해 사적이고 중요한 물건들이 담긴 곳이었다. 서랍을 닫고 보니 적당한 장소라는 생각이 브루스의 머리를 스쳤다. 꽃잎이 안전하게 보관된 것에 만족한 그는 마음 놓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청소하는 광경을 보고 꽃을 기억해냈다.
"알프레드, 그 꽃 버리지 말아요."
"꽃이라면, 외계 장미 말씀이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렇게 싱싱한 꽃을 버리면 귀한 꽃 낭비니까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알프레드의 말투에 브루스는 의아해했다.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케이브에 들러 장미를 확인했다. 알프레드의 말대로 장미는 새벽에 보았던 것과 달리 여전히 싱그러웠다. 브루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분명히 꽃잎을 주웠었는데. 낮과 밤에 따라 생기를 얻고 잃는 매커니즘인 걸까. 아니, 아니었다. 빈 자리 없이 완벽함을 뽐내는 꽃송이를 보며 브루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새벽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꽃이었다. 시든 꽃이 사라지고 싱싱한 꽃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평범한 장미였다면 알프레드가 수고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구 상에서 딱 한 명이 키우는 꽃이었다. 지금까지 클락이 아무도 모르게 새 꽃을 꽂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기까지 굉장한 노력이 들었을 귀한 꽃을. 마음에 든다는 말 한 마디에 진심을 알아주지도 않는 그를 위해서. 이렇게나 널 생각해주고 있다며 지나가는 말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었는데도 묵묵히. 브루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클락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올라갔다. 멍하게 침대 위에 앉아 있던 그의 시선에 문득 테이블이 들어왔다. 그 안에는 새벽녘에 주운 꽃잎이 들어있을 것이다. 브루스는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꽃잎은 겨우 몇 시간만에 완전히 말라 있었다. 그는 신기해하기 보다는, 원래 이렇게 빠르게 마르는 쪽일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뿌리가 있어도 지구의 환경에서는 살지 못하는 꽃인데, 잘린 꽃이 며칠씩 버틸 리가 없었다. 이런 속도라면 아마 하루에 하나씩 갈아야 했을 것이다.
브루스는 조심스럽게 꽃잎을 집어들었다. 마른 꽃잎답지 않게 보드라운 촉감이 전해졌다. 꽃송이에 달려 있을 때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빛 바랜 색깔이 오히려 은은하게 아름다웠다. 그는 충동적으로 꽃잎을 코에 가져다댔다. 숨을 들이쉬자 희미한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따스한 햇빛의 냄새였다. 브루스는 꽃의 주인을 떠올리게 하는 향을 맡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에 빠졌다.
5.
배트맨에게서 몇 주째 연락이 없었다. 케이브로 통신을 연결해봐도 응답하는 것은 나이트윙이나 레드로빈 혹은 로빈이었다. 그들에게 브루스의 행방을 물으면 너무 바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른 아침 꽃을 갈아주러 찾아가도 브루스는 통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된 클락은 늦은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고담 상공을 날며 도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패트롤을 도는 히어로가 있었지만 배트맨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었다. 패트롤도 포기할만큼 다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주변 사람들을 지켜보아도 알프레드나 브루스의 아들들에게서 걱정이나 우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브루스는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부러 피한다는 뜻이었다. 찾으려면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클락은 그러지 않았다. 데면데면할지언정 클락을 상대해주던 브루스가 이제 와서 그를 피한다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의미였다. 클락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물론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최악의 뜻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클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슈퍼맨은 희망을 상징하는 히어로였다. 그런 그가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보고 희망을 얻겠는가. 그래서 클락은 브루스를 믿었다. 결론을 내리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그의 진심을 안 이상 브루스는 꼭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그는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저스티스 리그는 그렇지 않았다. 배트맨이 없다고 리그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렇게 무능하지 않았다. 그저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배트맨이 사라지자 평소보다 비효율적일 뿐이었다. 아주 많이. 한 달 여가 지나고, 단번에 잡았어야 할 외계생물체를 몇 시간의 고전 끝에 간신히 포획하고 돌아온 날, 결국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배트맨은 어디 있지? 파트타이머라는 핑계로 종종 호출을 무시할 때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장기간 연락두절인 적은 거의 없었다. 브루스와 친한 창립 멤버들은 걱정부터 표시했다. 할마저도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이 클락을 향했다. 자타공인 배트맨의 가장 친한 친구인 클락은 자신이 알아보겠다는 믿음직스러운 말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물론 줄행랑이었다. 브루스는 안전하며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돌아올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클락이 어떻게 알고 있으며 배트맨은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을 거라는 것은 기자나 슈퍼브레인을 가진 크립토니안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대고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졸지에 개인 임무가 생겨버린 클락은 한숨을 쉬며 지구로 향했다. 브루스와 자연스럽게 만날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했다.
클락은 비뚤어진 보타이를 바로하려고 애썼다. 이 이상한 악세사리는 아무리 균형을 맞춰도 금세 한 쪽으로 축 늘어졌다. 그는 평범한 타이가 그리웠다. 사람들이 축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일곱 번째로 목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 작은 손이 등을 찰싹 내리쳤다. 클락은 어깨를 움츠렸다. 손의 주인이 걱정되어 한 행동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사람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가만히 좀 있어요, 스몰빌!"
로이스의 핀잔에 클락은 어깨를 좀 더 구겼다. 그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로이스는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돌아섰다. 그녀는 곧 유명 정치인과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클락은 취재할 상대를 찾는 척 홀과 그 너머의 공간들을 바라보았다. 브루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클락은 머리를 긁적였다. 브루스 웨인은 대외적으로 휴가 중이었지만, 이번 자선파티에는 참석한다는 뜻을 보내왔다. 브루스가 그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클락은 혹시라도 마주치게 되면 브루스가 불편해할 거라고 생각해 다른 취재를 자원했었다. 하지만 저스티스 리그의 동료들이 브루스의 소식을 알아오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워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오고 말았다.
적당히 취재하는 척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핑거푸드를 집어먹으며 시간을 보내던 그의 귀에 낯익은 심장박동이 잡혔다. 클락은 거리와 방향을 가늠하며 브루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으로 도망쳤다. 잠시 후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브루스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구석의 그림자에 숨어서 클락은 가만히 그를 살펴보았다. 부상은 없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안도가 밀려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가 관찰에 푹 빠진 사이, 브루스는 능숙하게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어갔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 악수를 나누다가, 로이스를 마주쳤다.
"오래간만이군요, 레인 양."
"로이스라고 불러주시라니까요."
"이런, 깜빡했네요."
"다음부터 잘 하면 되죠."
"그럼 용서해주시는 거죠?"
"물론이죠. 웨인 씨가 그런 표정으로 물어보는데 용서 못 한다고 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브루스라고 부르세요."
클락은 둘을 지켜보며 혼자 미소 지었다. 브루스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를 향한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 클락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담소를 이어가던 브루스가 문득 로이스에게 물었다.
"혹시 혼자 왔나요? 마음 같아선 제가 파트너를 해드리고 싶은데."
"안타깝지만 같이 온 사람이 있어요. 동료인데 이쪽에... 어디 갔지?"
그를 찾는 로이스의 목소리에 클락은 재빨리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갔다. 적당히 가까워졌을 즈음 사람들에게 치여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척 허공에 수첩 든 손을 흔들자 브루스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빠르게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가 대외용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브루스의 밝은 모습을 좋아하듯, 브루스는 언제나 그가 바보 같이 구는 것을 재미있어했다. 클락은 로이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쉴 때까지 허우적대다 겨우 도착했다. 로이스에게 사과하는 그를 보며 브루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로이스의 동료라면...?"
"데일리 플래닛의 클락 켄트입니다. 전에 만났었죠."
"그래요?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다보니. 미안합니다."
이것은 둘의 오래된 장난과도 같은 것이었다. 클락은 브루스가 평소처럼 받아주는 것에 조금 안심했다. 브루스는 그를 보고도 놀라거나 거북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로이스가 클락의 어깨를 두들기며 눈을 찡긋거렸다. 인터뷰 준비를 하자는 신호였다. 클락이 헛기침으로 대답하자 로이스는 곧바로 인터뷰 중 방해 받지 않을 만한 공간으로 브루스를 유인하기 시작했다.
로이스는 인터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비웠다. 아무래도 아까 유명 정치인과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단 둘이서 인터뷰를 계속해야 했다. 질문을 마친 클락은 수첩에 정리한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다 브루스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브루스는 흥미 없다는 태도로 발코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클락이 운을 뗐다.
"저, 웨인 씨.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하세요."
"여기서는 좀..."
브루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클락이 하려는 말이 이제 대답을 해달라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클락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깨닫고 다른 내용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브루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브루스가 앞장 서려는 듯 몸을 돌렸지만 클락은 머뭇거렸다. 브루스가 생각하는 주제도 공개된 장소에서 나눌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클락이 하려는 말은 차원이 달랐다. 적당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좋은 생각이 난 클락은 먼저 가던 브루스의 팔을 잡았다. 클락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브루스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브루스가 이마를 살짝 찡그리려는 순간, 그의 몸이 크게 흔들리더니 무언가 따뜻한 것이 닿았다. 그 직후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휘황찬란한 빛이 눈 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가자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뜨며 핑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고 나니 그제야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주위가 온통 새까맸다. 그리고 굉장히 익숙했다. 잠시 후 브루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슈퍼맨이 그를 웨인 엔터프라이즈 빌딩 꼭대기로 끌고 올라온 것이다. 브루스가 어이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자 클락이 멋쩍게 사과했다.
"미안해. 그런 곳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거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브루스는 빨리 본론으로 건너 뛰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클락이 꺼낸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실... 리그 때문에 왔어."
"리그?"
"네가 말도 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호출을 안 받은 건 처음이잖아. 다들 너한테 무슨 일 생긴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 심지어 할도."
마지막 부분에는 살짝 웃음이 섞여 있었다. 브루스 역시 어울리지 않는 이름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클락은 다시 진지해졌다.
"그리고 일부는... 불평하고 있어. 무책임하게 멋대로 사라졌다고."
"케이브에서 보조해주고 있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네가 있는 거랑은 다르잖아."
무게도 분위기도 다르다고. 그렇게 중얼거린 클락은 어려운 말을 꺼내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왜 안 오는지 알아. 하지만... 네 빈 자리가 너무 커."
"......"
"개인적으로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지만, 리그의 일원으로서는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
브루스가 대답하지 않자 클락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덧붙였다.
"일부러 피할 필요 없어, 브루스. 네가 부르지 않는 한은 케이브에 찾아가지도 않을 거고, 리그에서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거야.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줘."
한참 뒤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락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니 남은 것은 브루스를 데려다놓는 것뿐이었다. 클락이 뭘 하려는지 깨달은 브루스가 노골적으로 짜증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클락은 웃음으로 받아넘기곤 브루스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브루스는 몇 번 꿈지럭거리다 포기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천천히 가. 추워."
클락은 브루스가 요청한대로 느릿느릿 날아가는 대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고도를 높였다. 브루스는 고개를 돌려 발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천 번을 본 고담의 야경이지만 차가운 밤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이런 높이에서 내려다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더러운 거리도, 비명 소리도 모두 어둠에 잠겨버리고 반짝이는 불빛만 보이는 도시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까지 고요해지는 기분이었다. 브루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래 전 그들이 막 우정을 쌓기 시작할 무렵, 클락의 강함과 부드러움에 반해 단순한 친구를 넘어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실체를 갖기 전에 포기해야 했다. 클락이 로이스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루스는 로이스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로이스 레인은 그가 보아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막 싹이 트려던 감정을 밟아 죽이고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묻어버렸다. 욕심을 부리다 힘들게 얻은 우정마저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만들어낸 자기방어기제였다.
클락이 고백을 했을 때 의심을 거듭한 것 역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클락의 충동적인 한 마디에 휩쓸려 단단하게 아문 상처를 다시 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클락의 진심은 그의 심장을 뒤흔들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을 수면으로 끌어 올렸다. 결국 그는 감정이 되살아났음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두려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연인 관계가 되었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까지 쌓은 우정까지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그는 네 아들을 키우며 자신이 사랑을 주는 것에도 받는 것에도 서투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심지어 고담에 매인 몸이기까지 했다. 그는 그런 자신이 클락의 애정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리고 클락을 똑같이 사랑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욕심을 부리다 가진 것까지 잃는 것보다는 가진 것을 지키는 것이 나았다.
그가 파티에 참석한 것은 클락에게 거절의 의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케이브로 부를 수도 있고 고독의 요새로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거절하기 위해 따로 불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클락이 참석할 만한 파티를 택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이스에게 동행이 있냐 물으니 클락이 나타났다. 하지만 오늘로 길었던 고민을 끝내자는 마음과 달리, 기쁨으로 눈을 빛내는 클락을 보니 조금만 더 미루고 싶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도 침묵을 지키며 클락에게 말할 기회를 넘겨버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가버리게 된다. 결심이 흔들리고 있음을 자각한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브루스는 클락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진심이라는 거 알아."
브루스의 차분한 목소리에 맞춰 클락은 최대한 침착을 가장했다. 하지만 브루스를 안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살짝 들어갔다. 뒤늦게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음을 깨닫고 얼른 힘을 뺐지만 브루스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클락이 살짝 내려다보니 브루스는 시선을 피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락은 어쩐지 브루스의 대답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받아줄 수 없어."
아, 역시. 클락이 씁쓸하게 생각했다. 가능성이 낮음을 알면서도 도전했던 바이지만, 실망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클락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 소리를 듣고, 브루스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나는 지금 가진 것까지 잃고 싶지 않아."
그가 싫어서가 아니다. 브루스의 말 속에는 그 역시 이 이상을 원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저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 클락은 더욱 더 안타까웠다. 브루스는 언제나 철저하게 따지고 분석했다. 그것이 도움이 되는 일이 많았지만 가끔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놓치기도 했다. 특히 감정과 관련 되어 있을 때. 클락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왜 잃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주는 만큼 돌려줄 자신이 없어."
"그런 거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감정 표현에 서투른 거 알고 있으니까."
"......"
"브루스."
"...미안."
브루스가 내린 결정은 스스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바꿀 수 없었다. 그의 고집을 겪을만큼 겪어본 클락은 상황을 악화시키기 전에 물러나기로 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따르겠다는 말로 브루스를 여기까지 이끈 것이었다. 브루스의 선택이 어떻든, 결과는 정해졌으니 그에 따라야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은 전하고 싶었다.
"미안해 하지마. 진지하게 우리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된 거야. 그걸로 만족해."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둘은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 기자와 CEO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홀로 들어가니 그들을 찾고 있었는지 로이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둘 다 어디 있었어요!"
브루스가 호텔을 한 바퀴 돌며 인터뷰를 했다고 둘러대는 것을 들으며, 클락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오늘 할 일은 여기까지였다. 동료들에게 배트맨이 돌아올 거라고 알려줄 수 있고, 브루스 웨인의 자선사업 계획에 관한 기사를 쓸 수도 있다. 그리고 기다리던 답까지 들었다. 비록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로이스에게 끌려가던 브루스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클락은 말없이 웃어주었다. 약속했던 대로, 걱정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6.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관계가 변할 뻔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브루스의 기억과 서랍 속에 잠든 마른 꽃잎뿐이었다. 그 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들의 우정은 지켜질 것이고, 그는 클락을 잃지 않을 것이다.
약속대로 클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다정하게 웃어주고 바보 같은 농담을 하며 가벼운 터치를 했다. 어색함을 느끼고 조금 물러나든 그가 신경 쓰이지 않도록 배려한다며 몸을 사리든,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거라는 브루스의 생각과 달리 클락의 태도는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브루스의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슴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브루스는 클락의 시선과 몸짓에 애정이 가득 담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이에 대해 농담을 던지거나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브루스는 혼란스러웠다.
브루스는 잡념을 비우고자 평소보다 강도를 높여 패트롤을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며칠을 더 이어나가도 역시나 똑같았다. 채 풀리지 않은 피로가 그대로 쌓일 뿐이었다. 결국 엿새 째 되는 날 그는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슈트를 벗기는커녕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는 간신히 걸음을 옮겨 의자에 늘어졌다. 온몸에서 힘을 빼고 가만히 호흡을 고르고 있자니 서서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면 알프레드에게 혼날텐데.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곧 몇 번의 설득이 이어졌지만 몸은 여전히 들은 척 만 척이었다. 결국 머리는 몸과 협상을 시도했다. 딱 5분만 쉬고 일어나자고. 정말 좋은 생각을 짜낸 그의 머리를 칭찬하며 브루스는 곧장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눈을 떠보니 익숙한 장소였다. 그의 침대 위였다. 왜 여기 있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슈트를 벗고 침실로 올라온 적은 없었다. 그에게 몽유병이 있지는 않으니, 누군가가 슈트를 벗기고 침대까지 옮겼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그를 옮길 수 없었다. 딕이라면 가능할테지만 지금 딕은 블뤼디헤이븐에 있었다. 팀이나 데미안이라면...
브루스의 의문을 해소시켜준 것은 알프레드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나타난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어리둥절한 무표정에서 용케 생각을 읽어내고는 브루스가 질문을 던지기 전에 넌지시 말했다.
"켄트 님께서 수고해주셨습니다."
"클락이요?"
"꽃을 갈러 오셨다가 주인님께서 잠은 부디 침대에서 주무시라는 제 부탁을 무시하시고 차디찬 케이브에서 주무시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역시 케이브에서 잠들었다는 것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알프레드의 공격은 나중에 받아주자고 생각했다. 방금 더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꽃을 갈러 왔다고요?"
"설마 꽃이 매일 바뀐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셨던 건 아니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위대한 탐정 자리는 반납하셔야할 텐데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켄트 님께 매일 문을 열여드려야 해서 알게 됐습니다. 켄트 님께서는 주인님과 다르게 무단침입을 꺼려하시더군요."
"그게 아니라-"
브루스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혹여나 알프레드가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클락과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브루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알프레드를 외면하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클락이 매일 장미를 가져다주는 것을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려면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이어지는 클락의 선물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결국 브루스는 텅 빈 왓치타워 복도에서 클락을 불러세웠다.
"왜 아직도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눈빛. 목소리. 꽃."
느닷없는 말에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던 클락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번졌다. 브루스는 모르고 있는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한 클락의 표정에, 브루스는 조금 불안해졌다.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브루스는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직감했다. 그런 브루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락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똑같이 했을 거야. 내가 네게 느끼는 감정은 몇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 같았어.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을 뿐이지. 난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브루스. 앞으로도 그럴 거고."
"......"
"그렇다면 네가 변한 게 아닐까?"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가는 클락의 등을 바라보며 브루스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클락의 말대로, 클락은 언제나 그에게 다정했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단지 그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변한 것은 그였다. 되살아난 감정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그가 클락을 의식하게 된 것일뿐, 클락은 오래전부터 쭉 그를 사랑해왔던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브루스의 머리 속에 작은 생각의 씨앗이 심어졌다. 그의 부족함을 잘 알면서도 사랑해온 클락이라면, 그의 모자람을 오랫동안 지켜봤으면서도 진심으로 사랑한다 말해온 클락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클락과는 의견 다툼도 잦았고 대립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언제나 원래대로 돌아왔고 가끔은 더욱 돈독해졌다. 그런 클락이 상대라면, 설령 그가 우려한대로 관계가 끝을 맞더라도 모든 것을 잃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남아있던 미련을 양분 삼아 하루가 지날수록 쑥쑥 자라났다. 언제부터인가는 밤거리를 내려다보면 클락의 품에 안겨 내려다본 고담이 겹쳐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작은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속삭였다. 만약 다른 길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진심을 호소하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던 클락이라면, 아마 그를 받아줄 것이다. 그렇지만 브루스는 클락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애절하게 고백할 때는 죽어라 밀어내놓고, 심지어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타박해놓고는 뒤늦게 마음이 바뀌었다며 사귀자고 요구하는 건 그가 생각해도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었다. 그의 마음을 변덕이나 동정, 미안함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고 클락이 다시 다가오기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클락은 기다릴만큼 기다려주었다. 이제 그가 나설 차례였다. 그저 용기가 부족할 뿐이었다.
메트로폴리스는 밤조차도 밝은 도시였다. 고담의 음산한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줄줄이 늘어선 가로등과 반짝이는 간판, 건물마다 켜진 불빛. 브루스는 호텔 발코니에 서서 화려한 도시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최대한 고담을 비우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끔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이번처럼. 렉스 루터가 웨인 테크의 최신 기술에 관심을 가져 그를 직접 메트로폴리스로 초청했던 것이다. 좋든 싫든 렉스 코프는 위협적인 기업이었다. 그의 눈밖에 나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다. 결국 브루스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루터와 하루 종일 함께 있었더니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했지만 기분 나쁜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오히려 뒤늦게 올라오는 술기운 때문에 더욱 생생해질 뿐이었다. 루터는 어떻게 해서든 브루스에게서 렉스 코프에 협력하겠다는 대답을 얻어내려 했는지, 그에게 집요하게 술을 권했다. 에둘러 거절하자 호프와 머시를 이용해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와인을 받아마셨다. 빈 속에 알코올이 들어가자 온몸이 후끈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와인과 루터의 취향을 칭찬하며 시간을 끌은 브루스는 다섯 잔을 마신 뒤 완전히 술에 취한 척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루터는 그 와중에도 협력하겠다는 말을 유도하려고 그를 끊임없이 구슬렸다. 하지만 루터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동문서답을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자, 루터는 결국 다음 날 술이 깨면 이야기하자는 말과 함께 그를 보내주었다. 효과적이고 훌륭한 방법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뒤부터 후폭풍을 겪기 시작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샤워를 했는데도 점점 더 뜨거워지는 몸을 식히고자 브루스는 발코니로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야경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을 서있던 것이었다.
브루스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데일리 플래닛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그가 생각났다. 이곳은 그의 도시였다. 그의 원동력인 태양이 사라진 밤이지만,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이다. 문득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곧바로 고개를 저어 흩어버릴 생각이었지만 브루스는 그러지 않았다. 취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도 괜찮을 것이다. 취했다는 것이 이토록 유용한 줄 알았다면 매일 취해있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브루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슈퍼맨?"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 분 여가 지난 후 브루스는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슈퍼맨?"
이반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브루스는 울컥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슈퍼맨."
브루스 웨인이 아닌 배트맨의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댄 직후, 한 줄기 바람이 스쳤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는 빨간 부츠가 떠있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시선을 들어 슈퍼맨을 올려다보았다. 의아함이 잔뜩 묻어있는 표정이었다. 브루스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위협적인 목소리는 낸 적 없는 듯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슈퍼맨에게 말을 걸었다.
"와줬군요, 슈퍼맨."
클락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 브루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들리자 걱정이 되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확인해보니 브루스는 호텔 발코니에 서있었다. 아주 무사하게. 그가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세 번째로 그의 이름이 불렸다. 인내심이 바닥났을 때의 배트맨 목소리였다. 배트맨으로서 그를 부르는 것이라고 여긴 클락은 더 볼 것도 없이 옷을 바꿔입고 브루스가 머무는 호텔로 날아갔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배트맨은 온데간데 없고, 웨인 씨가 있을 뿐이었다.
클락은 브루스 몰래 브루스의 몸을 스캔해 보았다.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브루스는 멀쩡했다. 아니, 다시 보니 그다지 멀쩡하진 않았다. 클락은 혈액 속에 섞인 알코올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브루스는 취해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클락은 발코니 안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브루스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 당겼다.
"여기 있다가 잘못해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들어가자."
하지만 브루스는 클락의 팔을 잡고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클락은 잠시 브루스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혀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취했다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를 불렀을 리는 없었다. 클락은 왜 불렀냐고 물으려다 이왕 맞춰주는 거 완벽하게 하자고 마음 먹고 짐짓 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웨인 씨?"
브루스는 이제야 만족했는지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하늘에서 메트로폴리스 야경을 구경하고 싶어요."
클락은 실소를 터뜨릴 뻔 했다. 도대체 브루스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취한 상태에서도 읽기 힘들다니. 아니, 원래 취한 사람이 더 알 수 없는 법이다. 클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잠시 도시에 귀를 기울였다. 도시는 잠잠했다. 잠깐 브루스와 어울려줄 시간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이번 한 번만입니다."
단호하게 말하며 클락은 브루스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일전에 고담에서와는 달리, 브루스는 냉큼 클락의 목을 감싸안았다. 향긋한 바디워시 향에 클락은 옅게 헛기침을 한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브루스는 발 밑의 야경을 보며 끊임없이 감탄했다.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단 둘이 있는데 왜 연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클락은 불평 없이 브루스에게 맞춰주었다.
한참 동안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다녔더니 술기운으로 올라갔던 체온이 떨어졌는지 브루스가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클락은 잠깐만요, 라고 중얼거리며 정지했다. 그리고 안아 들고 있던 브루스를 발등 위에 올려놓았다. 그를 지탱하는 것은 허리를 감은 클락의 팔밖에 없는데도 브루스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클락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듯이 편안하게 힘을 풀고 있었다. 클락은 그가 보여주는 신뢰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자신의 빨간 망토를 단단하게 둘러준 뒤, 그를 다시 안아들고 천천히 비행을 계속했다.
브루스는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다. 심장박동과 호흡은 조금 느렸지만 잠든 것은 아니었다.. 클락이 살짝 내려다보니, 브루스는 조금 멍한 눈으로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들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클락은 조금 더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잠시 후, 브루스가 불쑥 말을 걸었다.
"뭐하고 있었어요?"
클락은 잠깐 고민하다 가볍게 대답했다.
"일하고 있었습니다."
"슈퍼맨이 일도 하나요?"
"물론입니다. 심지어 야근까지 하는 걸요."
"진짜요? 그래서 뭘 하고 있었나요?"
"글쎄요. 기사를 좀 쓸까 생각해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기사요?"
"브루스 웨인과 렉스 루터의 만남에 대해서요."
브루스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비공식적인 초청이라 언론에 밝힌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설마 몰래 지켜본 건가요?"
술에 취해있는 브루스가 거기까지 생각할 줄 몰랐던 클락은 멋쩍은 표정으로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렉스 루터는 위험한 인물이라서요. 오래 본 것도 아닙니다. 잠깐, 아주 잠깐 루터가 허튼 짓을 하나 본 것뿐이에요."
"그럼 이번만 용서해 줄게요."
클락이 픽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하자 어깨를 으쓱인 브루스는 곧 도로 잠잠해졌다. 조금 후엔 숨소리도 차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브루스가 잠들었다고 생각한 클락이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그의 귀에 속삭이듯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해요."
클락이 우뚝 멈췄다. 브루스는 초조함에 가슴이 미친 듯이 죄어들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클락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브루스는 클락을 거절했던 것을 다시 한 번 후회했다. 이럴 거였다면 진작 받아들일 걸 그랬다. 그랬다면 클락은 실망하지 않았을테고, 자신은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부러 술에 취한 웨인의 모습으로 고백을 한 것은 혹여나 거절 당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속삭여봤고 뺨 꽤나 맞아본 웨인으로서도 가슴이 떨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브루스는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클락을 탓할 수는 없었다. 브루스는 재빨리 마음을 추스리고 웅얼거렸다.
"젠장, 술김에 말이 헛나왔네요. 얼마 전에 만난 여자라고 생-"
"거짓말. 그렇게 취하지도 않았잖아."
클락의 말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만취한 상태도 아니었던데다가,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고 쓸데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술기운이 꽤나 가셔 있었다. 그랬다. 이 남자는 혈관 속의 알코올 분자까지 볼 수 있는 빌어먹을 크립토니안이었다. 브루스는 이미 들통난 연기는 집어 치우기로 하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창피함도 창피함이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가 문제였다.
"...잊어버려."
"그렇겐 못 하겠어."
클락은 이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그를 놀리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살짝 이를 갈며 당장 호텔로 데려다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거절 당했다. 클락은 그를 안고 더 높이, 메트로폴리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도까지 올라갔다. 망토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이 에이는 듯해 브루스가 얼굴을 찡그리자, 클락이 코 끝이 서로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파란 눈 두 쌍이 마주쳤다. 다정함이 깃든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홀린 듯이 바라보던 브루스는 이제 조금도 춥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락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좌절감에 내려앉았던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사랑할 거라던 클락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클락은 브루스의 눈을 들여다보고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줘."
"뭘."
브루스가 발뺌했지만 클락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해가 뜰 때까지 이러고 있겠다는 듯한 표정에 브루스는 짧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플레이보이 웨인 말고. 진짜 네 모습으로. 내가 사랑하는 브루스의 입으로 듣고 싶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클락에게 확신을 얻은 브루스는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좋아해."
클락은 브루스의 고백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금 더 숙였을 뿐이다. 새 부리가 닿는 것처럼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브루스는 그 어떤 사람과 나눈 키스보다도 뜨겁다고 생각했다. 입술이 떨어진 후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브루스였다.
"네가 원하는 만큼 시간을 할애해주지는 못할 거야."
브루스는 여전히 실패를 걱정하고 있었다. 경고인지 예고인지 모를 말에 클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약속을 잡아놓고 가지 않을 수도 있어."
"괜찮아."
"같이 밤을 보내다 뛰쳐나갈지도 몰라."
클락이 웃음을 터뜨렸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웃음 소리가 브루스의 심장까지 울렸다.
"브루스, 난 네 그런 점까지 사랑해. 오히려 네가 변한다면 실망할지도 몰라."
브루스는 문득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나 마른 침을 삼킨 후에야, 브루스는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고담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
클락은 한 번 더 맑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웨인 씨."
+마지막이다ㅠㅠㅠ와ㅠㅠㅠㅠ엄마 제가 완결 쓰고 있어요ㅠㅠ
+끝! 났! 다!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주절주절 길어졌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 날아가고 완결을 내다니 장하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