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리전 기념
은 뻥이고 진단메이커로 키워드 받아서 쓰는데 이게 은근히 재미있다ㅋㅋㅋㅋㅋㅋㅋ
딕뱃의 소재 멘트는 '차라리 모르고 있었다면,', 키워드는 우스갯소리이야.
따뜻한 느낌으로 연성해 연성
-사랑해요.
브루스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도, 헛소리 말라고 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역시 마찬가지라는 대답도 없다. 넓은 등은 내 말을 들었다는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멈춰서있다.
보통은 무시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남자에겐 조금 다르다. 그는 내가 말을 잇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처럼, 그저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우스갯소리인 양.
이대로 가버린다면 그를 조금은 흔들어놓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바로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씩 웃으며 진심을 실없는 말로 포장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너무 삭막하게 사는 거 같지 않아요? 서로 사랑을 표현해야 화목한 가족이 된대요.
돌아온 건 묵묵부답이다. 브루스의 눈은 현미경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나는 그를 부르는 대신 테이블 위로 훌쩍 올라앉았다. 갑작스러운 내 무게에 테이블과 그곳에 놓여있던 것들이 일제히 달그락거렸다. 현미경 역시 흔들렸을 테지만 브루스는 여전히 반응이 없다. 일부러 턱까지 괴고 빤히 쳐다보자, 그제야 짧게 한숨을 쉬며 현미경에서 시선을 뗀다. 나를 바라보는 하늘색 눈동자는 피로 때문인지 평소보다 어둡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조금 쉬라니까는. 잔소리 하려는 기색을 느꼈는지, 그가 툭 한 마디를 던진다.
-누가.
아, 역시. 듣고 있었다. 대꾸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한 귀로 흘리는 법은 없다. 그는 차가워보여도 속은 따뜻한 남자였다. 물론, 편집증적인 면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가끔 들어선 안 되는 것까지 들을 때도 있다.
그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버린 날을 생각하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브루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나는 재빨리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명한 학자가 아닐까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게 네 말의 신빙성을 좌우하니까.
-실망이에요, 브루스. 내 말을 못 믿는 거예요?
브루스는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나는 과장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리처드 그레이슨이라는 현자가 그랬어요. 됐죠?
그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컴퓨터 쪽으로 향했다. 나는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았다. 장난을 핑계로 그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하고.
-브루스도 아는데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 잖아요. 지금 연습해서 애들한테 해주는 건 어때요? 자, 따라해봐요. 사랑해. 브루스? 빨리요. 사랑해.
당연하게도 브루스는 따라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실컷 내뱉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사랑해, 사랑해. 당신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수십 번을 되뇌고 나니 마음이 조금 후련하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나는 물러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지만 그 전에, 나는 아주 약간의 사심을 담아 그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말로 하는 게 너무 부끄러우면 행동으로 해도 괜찮아요. 적절한 스킨쉽은 건강에도 좋대요.
브루스는 나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내가 눈썹을 찡긋거리자 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팔을 내렸다. 안 될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아쉽다.
곧 내 쪽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받아보니 케이스 파일이었다. 브루스를 쳐다보자 짧은 명령이 돌아왔다.
-검토해.
그 한 마디와 함께 대화는 끝났다. 이제 돌아가든지 남아서 그를 돕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 나는 물론 후자를 택한다.
-네네, 알겠습니다.
케이브는 다시 조용해졌고, 내 첫 고백은 그렇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파일을 읽는 척 그 너머로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모니터에 집중한 옆 얼굴은 마치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 같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다면.
브루스는 그를 향한 내 마음을 알고 있다. 어느 눈 오는 날 밤 제이슨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들어버린 탓이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부주의했던 나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그가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길 기대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무지를 가장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내가 진실을 안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 아직 용기가 없다. 거절 당해서 지금의 관계까지 잃고 싶진 않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랑한다 말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흘려 넘기려는 브루스의 의도에 맞춰 장난스럽게 얼버무리는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가족이나 동료라는 방패 없이 한 남자로서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꼭.
어쩐지 해낼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내 시선을 느끼고 한 쪽 눈썹을 들어올리는 브루스에게 웃어주었다.